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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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여덟번째 뉴스레터] 몰래 들어간 작업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여덟 번째 레터는 멤버인 최은총과 박예린이 각각 정주희 작가, 이지은 작가를 만나고 느꼈던 것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최은총과 정주희 작가, 박예린과 이지은 작가는 일련의 만남을 통해 각자의 관심 주제와 작업의 연결고리를 연결짓는 협업을 진행하였다. 에포케 레테는 이번 기회를 통해 향후 비평가-작가 간의 다양한 교류와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시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 에포케 레테 멤버 최은총에 의해 기획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서양화과 교류모임' 산하 비평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된 글들입니다. * 이 글들은 2023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우리 대학원 정상영업합니다》((2023.6.7.-6.11.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숨 프로젝트 breathing project>를 만나고, 정주희 작가님께.] 최은총 x 정주희 작가
[② 슬프게 반짝이는 밤과 아름답게 창백한 낮에도] 박예린 x 이지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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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프로젝트 breathing project>를 만나고, 정주희 작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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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주희 작가님. 작가님의 작업을 만난 후 이유 모를 후유증에 시달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 기억을 담아 편지를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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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우리 대학원 정상영업합니다》((2023.6.7.-6.11.) 전시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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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작품과 마주할 때 거리를 두기 힘들더군요. 일련의 <읽기연습 reading practice>(2014-2019) 시리즈에서 작가님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폭력을 견디고 있었죠(도 1). 특히 <읽기연습 2>에서 10초 간격으로 10분간 가해지는 회초리질로 인해 종아리는 점점 부어오르다 못해 기다란 흔적을 남겼고, 단말마의 신음은 떨리는 목소리로 변해갔습니다(도 2). 체벌 가운데 읽어 내려가는 사건들에 귀 기울이고 싶지만, 사정없이 내려쳐지는 회초리 소리와 고통으로 점철된 목소리 때문에 집중하기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발화가 끊기긴 해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 작가님이 천착해온 저항의 의미가 체감되었던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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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정주희, <읽기연습 1 reading practice 1> , 4k single channel video, 4’ 28”, 2015 |
(도 2) 정주희, <읽기연습2 reading practice 2> , 4k ”, two-channel video, 10’ 28”,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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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숨 프로젝트 breathing project>(2023)를 선보여 주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도 3). 이 작품에서 앞선 작업과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바로 퍼포머를 앞세웠다는 점과 생명과 직결된 ‘숨'으로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인데요, 이에 대한 작가님의 대답이 기억에 남아요.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굴레를 경험하며 “내가 아닌 타자를 보게 되었고, 모두가 숨 쉬지만 각기 다른 숨을 가졌음을 발견했다”라고요. 저도 언젠가 들어봤던 누군가의 숨소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가슴이 부풀었다가 작아지는 모습. 함께 붙어있을 때 느껴지던 들숨과 날숨..
작가님의 말처럼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숨 쉬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죠. 이 지점에서 숨이란 “생을 위한 ‘비자발적 노동’임을 발견”했다고 했을 때 조금 놀랐어요.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주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숨마저 노동이라니.. 곰곰이 생각하다 이 지점에서 이전 작업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에게 억압은 숨과 같이 떼어놓을 수 없었음을, 그리고 <숨 프로젝트>도 작가님의 삶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저항’이었음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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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정주희, <breathing project-who:yjs>, 01'23", 4k single channel video,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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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은 ‘생명의 권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사회에 의해 가려져 있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이자 ‘애도가치’를 인정받는 존재로 다시 그려내는 과정인 것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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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감내하는 모습이 저항적이기보단 허무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저항으로 와 닿은 이유는 ‘힘’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Pamela Butler, 1956-)는 『비폭력의 힘 The Force of Nonviolence』(2020)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폭력'에 대한 정의가 모호할 수밖에 없음을 얘기합니다. 버틀러는 이미 폭력이 권력의 도구가 되었기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담론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폭력의 정의를 발견하고 확보하는 일조차 힘들다고 말합니다. 버틀러는 우리 삶에 숨어든 폭력들 안에서 “비폭력의 힘"을 얘기해요.
버틀러는 비폭력의 한 방법으로 몸의 괴로움과 불안정을 내보이는 방식의 시위가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요구를 내놓기도 하고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본디 숨이란 목숨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니죠. 작가님은 이들이 애써 숨을 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미약한 ‘중단'의 행위일지 모르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니는 숨을 참는다는 점에서 비폭력적 실천을 체현하는 것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이들이 숨을 내뱉기 전까진 숨을 참는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다시 생각해 보면 세상이 가하는 폭력도 보이지 않는데, 그에 맞서는 비폭력을 드러내기에는 또 얼마나 힘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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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정주희, <breathing project-who:lhj>, 02'08", 4k single channel video, 2023 (도 5) 정주희, <breathing project-who:khj>, 00'26",4k single channel video,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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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억압과 저항에 대한 유비로 바라보고 한번 숨 쉬는 과정을 되돌아봤어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숨이란 건 코로 공기를 마시고, 폐에서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교환하며, 뇌에 산소가 전달되어야 하더라고요. 사회적인 노력은 또 어떨까요? 이 글을 읽는 조형관에서 쉬는 숨은 “실내공기질 관리법”에 의해 환기설비와 공기정화설비 아래서 쉬고 있죠. 만약 이 법령이 정하는 오염물질의 수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숨의 질은 달라질 수도 있어요. 새삼스럽게도 의식하지 않고 쉬던 숨에 복잡하게 얽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 존재했네요. 결국 제 숨도 개인-사회를 가로지르는 상호의존성을 지닌 하나의 구성체-작품 제목이 ‘프로젝트’이듯이-로 이뤄져 왔었군요. 그렇기에 숨을 참는다는 행위는 사회의 비가시적인 억압에 맞서 사회와 개인의 상호의존성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자, (찰나일지라도) 숨을 참는 동안은 사회 시스템을 정지할 수 있는 파업 행위를 하는 것일 수 있겠네요.
사회가 추구하는 매끄러움에 결국 어떤 숨은 가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기에 퍼포머들이 숨을 참는 과정은 잘 드러나지 않으며, 이내 숨을 내뱉더라도 아주 찰나의 모습만을 볼 수 있겠죠. 그러나 매끄럽고 유기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이들이 ‘참다가 내뱉는 거친 숨’은 작품 앞에 우리의 몸을 묶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숨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죠. 동시에 이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던지, 빨개진 얼굴, 충혈된 눈, 꽉 다문 입술도 보이게 되더라고요. 언뜻 이들이 숨을 참고 까치발로 선다는 점에서 조용히 세상의 규율에 순응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러나 이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아요. 우리를 뚫어지게 보고, 직시하고 있어요. 이들은 ‘응당 그래야 했던’ 순응을 가시화하기 위해 수면 아래서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규율과 응시의 존재를 자신의 몸으로 내보이고 있어요. 이들이 우리에게 응시를 돌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이만 작품 앞에서 멈춰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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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6) 정주희, <breathing project-how:tiptoeing>, 01'22",4k single channel video,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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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작가님이 ‘검은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남아요. 작가님의 작품 속 ‘검은 배경’은 배경지가 아니라 빛이 없는 암흑 속 공간이라고 말씀해 주셨죠. 단지 빛이 닿지 않았을 뿐이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존재한다고요.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왜 인물을 검은 배경 앞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아요. 세상 안의 어둠 속 존재들에게 빛을 비춰 그 ‘숨'과 ‘몸짓’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겠군요. 빛 덕분에 드러난 어둠 속 타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숨과 몸짓..
저는 또다시 오랜 기간, 이 작품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2023년 6월에
최은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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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윤리학-정치학 잇기 The Force of Nonviolence An Ethico-Political Bind』, 김정아 역 (문학동네,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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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이지은, <부화>, 캔버스에 유화, 31.8 x 40.9cm,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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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일찍이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환상성 - 전복의 문학 Fantasy: The Literature of Subversion』(1980)에서, 판타지가 리얼리즘에서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은폐되고 억압된 결핍과 틈새를 채워넣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문학적 양식이라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사회 규범과 정상성에 반하는 다양한 존재들을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그려내는 이지은 작가의 작업은 그 욕망을 어떻게 충족하고 있는가?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 세계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를 위해서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대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가 그려내는 판타지 속 주체들은 완전한 인간에서부터 인간의 형상을 탈화한 비인간 존재까지 다양한 빛깔을 띤다. 이들은 인간의 얼굴을 지녔지만 인간은 아니다. 이들의 몸은 꽃잎과 가느다란 줄기를 지닌 식물이거나, 잠자리의 날개와 새의 다리를 한 곤충, 그리고 순록의 뿔과 말의 몸체를 지닌 동물을 닮았다. 작가의 판타지 세계관에 따르면 이 존재들은 '하나님 아버지’ 혹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로부터 잉태된 인간이 아니라 아담 없는 이브들만의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존재들의 염원으로 알에서 깨어난 불온한 존재다(도 1). 가부장적 신화와 모체를 매개로 한 혈족 관계는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모방되고 수행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자연화된 제도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습적 승인에서 벗어나 탄생한 작품 속 존재들은 그 퀴어한 몸체가 보여주듯 ‘정상적’이지 않다. 오직 이들의 탄생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기억하는 또다른 존재들만이 이들의 존재를 지탱하지만, 너무나도 단단한 규범적 세계에서는 큰 바람막이가 될 순 없었다. 그리하여 사랑과 연대에도 불구하고 앳된 얼굴을 한 소녀의 얼굴로 묘사된 이 존재들은, 길지 않은 생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위태롭고, 불완전하고, 취약한 것으로 상정하고 이 세계를 낯설어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존재들의 세계는 한번도 에덴 동산과 같은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전쟁>(2022)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하늘에서 유성우의 폭격이 일상처럼 닥쳐 옴에 따라 언제나 ‘망종(亡終)'을 각오해야 하는 묵시록적 세계이다(도 2). 이러한 세계관을 토대로 작업 초기 이지은 작가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그려냈다. 이 존재들은 꽃과 나비, 풀줄기로 무장한 존재들은 얼음같이 차가운 밤에도 가시가 난 나뭇가지를 들고 전장에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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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이지은, <전쟁>, 종이에 과슈, 수채화, 24.2 x 33.4 cm,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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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의 전장은 여전히 평면 회화 속에서 전개되는 가상의 현장이기에, 잭슨의 지적대로 질서의 한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일 수 있으나 실재하는 현실을 전복하는 행위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판타지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환영적 세계의 창조를 통한 상상계적 회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 속에서 상상적 도피를 만끽하고 향유하기보다, ‘판타지 세계가 그려진 캔버스'를 상징계적 의미화의 공간으로 상정하면서 현실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 개입의 방법을 찾은 듯하다. 이는 작가 본인이 이야기하듯 이들을 억압하는 정상성과 사회적 규범이 고정되고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허무하리만큼 미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 간의 모방과 반복을 통해 정상성을 획득한 일종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잭슨의 정의와 달리,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캐스린 흄(Kathryn Hume)이 『환상과 미메시스 Fantasy and Mimesis』(1984)에서 이야기했듯 오직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된 리얼리티(consensus reality)'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판타지 세계'와 ‘캔버스’를 분리함으로써 달성되는 효과일 것이다. 특히 매끄러운 화면 질감과 명암의 대비가 적은 색채 사용을 통해 평면적 특성이 강조될 때, 그리고 커튼이라는 소재와 캔버스 겉면에 둘러진 테두리의 사용에서 가상 세계의 허구성은 담담히 인정된다(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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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이지은, <밤이면 찾아오는 손님>, 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 112 x 145.5 cm,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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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캔버스가 상징계적 공간이 될 때, 시각적 의미 작용은 화면 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각적 의미작용은 곧 캔버스를 벗어나 현실 세계로 계속해서 탈출하려 한다(도 4).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회화가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므로 판타지의 전복적 가치는 (그게 꼭 캔버스 속의 상황이 아니라 해도)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화 작용의 기제를 드러내고 기존의 규범적 상징을 재의미화 함으로써 '합의된 리얼리티로부터 일탈'을 꾀하는 것으로부터 획득된다. 일례로,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비, (백합, 붓꽃 등의) 꽃, 하트 이미지는 모두 문화적으로 여성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습적인 상징으로, 작가가 특정 이미지를 참조하지 않은 채 해당 단어를 보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떠올릴 만큼 의도적으로 전형화 된 시각적 문법을 따라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표준화된 결혼 및 장례 등 사회적 관습이야말로 인간사에서 모방과 반복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무언가 빠지고 덧대어진 듯하나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의식을 치르는 장면에서 작가는 규범의 기제를 위트 있게 비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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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이지은, <말 없는 비밀>, 종이 판넬에 과슈, 72.7 x 90 cm,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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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지은 작가는 비록 좌절될 것임에도 언젠가 세계가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을 가진 존재들의 서사를 작품 속 내용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회화적 장치에 따른 의미화 작용을 통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판타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도 5). 전복은 인간의 규범적 역사가 그러했듯 슬프게 반짝이는 밤과 아름답게 창백한 낮을 오랫동안 지나는 동안에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다양한 빛깔'의 가능태들이 현실에 계속해서 침입할 것이며 그리고 존재들의 연대와 사랑이 함께할 테니, 벌써부터 지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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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이지은, <너무 한가지 빛깔>,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30.3 x 97cm,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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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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